글씨는 사라져도 기운은 남는 장인의 하루
건물의 얼굴이라고 불리는 현판(懸板)은 단순한 간판이 아니다. 그 속엔 장소의 역사, 철학, 가치가 담겨 있다. 하지만 오래된 현판은 바람과 비에 닳아 글씨가 흐려지고 나무가 썩어가기도 한다.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인근의 조용한 한옥 공방에서 이무석(가명, 70세) 씨는 오늘도 닳은 현판 위에 붓을 들고 있다. 그는 서예를 전공하고 45년간 현판 복원만을 전문으로 해온 장인이다.
이 장인은 말한다. “현판은 글씨를 남기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기운을 새기는 거예요.” 그의 하루는 그렇게 사라져 가는 한자의 획마다 생기를 다시 불어넣는 일로 흘러간다.
서체 하나에도 장소의 성격이 담기는 장인의 하루
현판 복원 작업은 단순히 글씨를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다. 먼저 서체 분석, 필압의 세기, 붓놀림의 방향을 정밀하게 연구한 뒤, 원래의 정신을 해치지 않도록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에 남는 작업은 충청도의 한 고택에 걸려 있던 조선 후기 현판 복원이었다. 나무는 썩어들어가고 글씨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사진 한 장으로 복원이 가능하냐는 문의가 들어왔다. 이무석 장인은 조선 후기 해서체의 특징을 분석하고, 붓의 각도를 추정해 복원에 성공했다. 그 현판은 지금도 고택의 대문 위에 다시 걸려 있다.
장인의 하루들이 붓끝 하나에 담긴 수백 년의 시간이 된다
이무석 장인은 기계 각인이 아니라 손글씨 복원을 고집한다. “기계는 똑같이 만들 수 있어도, 마음은 못 담아요.” 그래서 그는 붓, 먹, 천연 안료를 사용해 글씨를 복원하며, 나무판도 원목을 깎아 직접 다듬는다.
한 번은 사찰에서 의뢰한 ‘무량수전(無量壽殿)’ 현판 복원을 맡았는데, 나무 틀의 균열까지 복원한 뒤 붓글씨를 다시 얹었다. 승려들은 “이제 이 건물이 다시 살아난 것 같다”라고 평했다.
그는 붓질 하나에도 철학이 담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게, 그리고 단호하게 작업한다.
사람보다 오래 남는 글씨를 짓는 장인의 하루
이무석 장인의 공방은 향 냄새가 나는 조용한 공간이다. 작업대 위엔 썩은 현판 조각들과 새로 깎은 원목들이 공존한다.
“사람은 떠나도 글씨는 남아요. 그리고 그 글씨는 사람을 다시 불러오죠.” 그는 오늘도 현판 한 조각을 손에 들고, 옛 한자의 결을 따라간다. 먹을 갈고 붓을 적시는 그의 하루는 그렇게 장소의 시간을 복원하는 일로 흐른다.
서울 종로, 오래된 현판 글씨를 복원하며 장소의 기운을 되살리는 장인이 있다. 손끝으로 세월을 다시 새기는 그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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