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예로부터 비단과 한지로 유명한 고장이다. 고려와 조선을 거쳐 내려오며 비단은 왕실과 귀족의 옷감으로 사용되었고, 서민들에게는 꿈같은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값싼 공산품과 기계織物(직물)들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전통적인 직조 방식으로 비단을 짜내는 장인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손끝에서 천년의 빛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로 68세가 된 박은주(가명) 장인은 40년 넘게 베틀 앞에 앉아 실을 걸고, 하루 10시간 이상을 손으로 북을 움직이며 비단을 짜온 인물이다.

그녀의 하루는 단순한 직업을 넘어, 전주가 품고 있는 문화유산을 지켜내는 긴 여정과도 같다.
장인의 하루를 여는 베틀 소리
박 장인의 공방은 이른 새벽,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문을 연다. 그녀는 먼저 하루 동안 사용할 명주실과 견사(비단실)를 정리한다. 가느다란 실은 마치 머리카락처럼 얇아 손끝으로 잡아도 끊어지기 쉽다. 그래서 습도와 온도를 맞추고, 촉촉한 공기 속에서 실을 다루는 것이 기본이다.
베틀 앞에 앉으면 그녀의 손은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발로 베틀의 발판을 밟고, 손으로 북을 잡아 실을 엮는다. “비단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아요. 수천 번, 수만 번의 같은 동작이 쌓여야 한 폭의 천이 완성됩니다.” 그녀의 말처럼, 매일 반복되는 동작 속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성과 집중이 깃든다.
빛을 품은 실의 비밀을 담은 장인의 하루
비단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고운 촉감 때문만이 아니다. 비단실은 빛을 머금어 반짝이는데, 이는 실의 단면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박 장인은 “비단은 해가 뜨는 아침과 해가 지는 저녁,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빛을 냅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 같지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색을 입히는 염색 과정에도 정성을 다한다. 천연 쪽빛, 치자빛, 홍화빛으로 물든 실은 자연의 빛깔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색이 고르게 배어들도록 하루 이상을 담가야 하며, 건조 과정에서도 바람의 세기와 햇볕을 섬세하게 조절해야 한다. 그렇게 완성된 실은 베틀 위에서 하나의 화폭처럼 짜여 간다.
장인의 고집과 고독이 묻어 있는 장인의 하루
요즘은 전통 방식으로 비단을 직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기계가 하루 만에 뽑아내는 양을 그녀는 몇 달이 걸려야 겨우 완성한다. 하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손으로 짜는 방식을 고수한다. “빠른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비단은 온기가 있습니다. 그 온기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지요.”
박 장인은 작업 중에도 늘 허리를 곧게 세운다. 작은 실수 하나가 무늬 전체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같은 자세를 유지하다 보니 허리 통증이 심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베틀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생의 반려와도 같다.
장인의 하루는 미래를 짜내는 손끝이 숨어 있다
그녀는 요즘 젊은 세대와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전통적인 비단 직물을 현대 패션과 인테리어에 접목해 새로운 시장을 열고자 한다. 실제로 그녀가 짠 비단은 고급 한복 디자이너들과의 협업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고, 최근에는 전주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박 장인은 말한다. “비단은 화려함만이 아니라, 오래 갈수록 깊어지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제 손끝에서 짜낸 이 비단이 앞으로도 사람들의 삶 속에서 빛나길 바랍니다.”
오늘도 그녀는 베틀 앞에 앉아 실을 엮는다. 반복되는 동작이지만, 그 속에서 천년의 빛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전주 비단 직조 장인 박은주, 손끝에서 천년의 빛을 짜내는 삶. 전통 직조의 세계와 장인 정신을 따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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