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의 하루엔 실타래처럼 이어진 마을의 웃음이 있다
작고 말랑한 손뜨개 인형.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고, 어른들에게는 추억이며, 누군가에겐 위로다. 서울 은평구 한 평 남짓한 작은 방 안, 그곳에서 매일같이 뜨개바늘을 움직이며 인형을 만드는 할머니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정순옥(가명), 올해 81세.
정 할머니는 특별한 고객을 위한 인형을 만들지 않는다. 그녀의 인형은 길가를 지나는 아이들, 동네 아이들의 엄마, 혼자 사는 노인에게 자연스럽게 건네진다. 그녀는 말한다. “내 손이 아직 움직일 수 있을 때, 누군가가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마을 한복판에서 실타래가 감기듯, 그녀의 손끝에서 웃음이 실로 엮여간다.
인형 하나, 하루 하나 장인의 하루
정순옥 할머니는 10여 년 전 남편을 떠나보내고 처음으로 뜨개질을 시작했다. 우울감과 외로움이 깊어지던 시기, 동네 복지관에서 뜨개질 수업을 듣게 됐다. 그때 처음 완성한 인형이 고양이 모양이었다. 그 인형을 들고 가던 아이가 크게 웃으며 “할머니 이거 저 줘요?”라고 했던 그날 이후, 그녀는 하루에 한 개씩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하루는 새벽 5시에 시작된다. 손에 익은 바늘을 쥐고, 실타래를 감고, 패턴 없이 느낌대로 코를 잡아 나간다. “나는 도안이 없어요. 마음이 가는 대로 짜요.” 어느 날은 토끼, 또 어느 날은 커다란 곰, 또 다른 날은 동네 강아지를 닮은 인형. 그저 누군가가 좋아해 줄 거라는 생각만으로 만들어낸다.
인형 하나를 만드는 데는 3~5시간이 걸린다. 실은 모두 기증받거나, 직접 시장에서 조금씩 모은 것이다. “나는 재료보다 표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형도 웃고 있어야지, 보는 사람도 웃지.”
장인의 하루는 마을 전체가 고객이 된 손끝에서 나온다
정순옥 할머니의 인형은 SNS나 온라인 마켓에 올라가지 않는다. 대신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직접 나눠준다. 특히 어린이집 앞, 놀이터, 버스 정류장 등 아이들이 자주 다니는 곳에 작은 박스를 만들어 인형을 담아두기도 한다. 그 위엔 손글씨로 “필요한 친구를 한 명 데려가세요”라고 적혀 있다.
그녀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다고 말한다. 부모 모두 맞벌이라 혼자 놀던 아이가 인형을 집어 들고 “얘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그건 네가 지어주면 돼”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이후로도 매일 인형을 보러 오고, 가끔은 친구를 데려와 “얘네는 할머니가 만든 거야”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 할머니는 근처 치매 센터나 요양원에도 인형을 기증하고 있다. 말없이 손에 인형을 쥐여주면, 그 인형을 쓰다듬고 끌어안는 어르신들이 많다고 한다. “사람이 만질 게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내가 만든 게 누군가 손에 있다는 게 좋아요.”
작은 바늘이 만드는 진짜 연결이 장인의 하루이다
정순옥 할머니는 고령임에도 매일 바늘을 든다. “손가락이 아프기도 하지만, 이걸 놓으면 내 마음도 늙을까 봐 겁나요.” 그녀에게 인형을 만든다는 건 단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마을 주민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실타래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인형을 받은 아이의 엄마가 편지를 써주기도 한다. “할머니 인형 덕분에 우리 아이가 처음 친구를 만들었어요”, “외출하기 싫어하던 아이가 인형 가지러 나가요” 같은 말들이 그녀를 다시 바늘 앞에 앉힌다.
어느 날은 그녀가 만든 100번째 인형을 벽에 걸며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 인형들이 결국 나보다 오래 살아서, 이 동네를 지켜줄 거라 믿어요.” 그녀의 하루는 실타래처럼 조용하고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을은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다.
서울의 한 마을, 매일 손뜨개 인형을 만드는 81세 할머니가 있다. 그녀의 손끝에서 웃음과 위로가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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