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의 하루

장인의 하루 동네 숨은 고수 인터뷰 중 진주 누비 장인 – 바늘 끝에 새긴 천년의 온기

goomio1 2025. 9. 12. 07:26

한 벌의 옷은 단순히 몸을 덮는 도구를 넘어,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담는 매개체다. 특히 우리 조상들이 지혜롭게 전해온 '누비’는 한국의 기후와 생활환경에 맞춘 독창적인 바느질 기법으로, 그 안에 한국인의 섬세함과 인내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두 겹 이상의 천 사이에 솜을 넣고 일정한 간격으로 바느질해 보온성과 내구성을 높이는 누비는, 수백 년 동안 서민의 겨울옷에서부터 왕실의 의복, 심지어는 전쟁터의 갑옷 안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쓰였다. 그러나 산업화와 기계화의 흐름 속에서 손으로 천천히 꿰매는 누비는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에서는 여전히 바늘을 잡고 전통 누비를 이어가는 장인이 있다. 최은경(가명) 장인, 그녀는 50년 넘게 천과 바늘, 솜과 씨름하며 사람들의 삶을 따뜻하게 덮어왔다.

바늘 끝에 새긴 누비 장인의 하루

그녀의 하루는 단순한 바느질이 아니라, 천년의 온기를 꿰매는 고독한 여정이다.

 

천을 고르고 준비하며 아침을 여는 장인의 하루

최 장인의 하루는 새벽 햇살이 스며드는 공방에서 시작된다. 바느질보다 먼저 하는 일은 천을 고르는 것이다. 전통 누비에 쓰이는 원단은 무명, 모시, 명주, 때로는 견직물까지 다양하다. 각각의 천은 질감과 호흡이 달라, 쓰임새에 따라 다른 선택을 요구한다. 겨울철 따뜻한 솜옷에는 무명이 적합하고, 여름철 덥지 않게 걸칠 수 있는 옷에는 모시가 어울린다.
솜은 더욱 중요하다. 목화솜은 가볍고 따뜻하지만, 잡티가 섞이면 바느질 선이 울퉁불퉁해질 수 있다. 그래서 장인은 직접 솜을 고르고, 고르게 뜯어내어 펼친다. 이 준비 과정만 해도 하루가 다 가는 경우가 많다. “천과 솜을 제대로 고르는 것이 절반입니다. 아무리 바늘을 잘 놀려도 재료가 좋지 않으면 좋은 누비가 나올 수 없지요.”

 

장인의 하루는 바늘 끝에서 피어나는 무늬로 탄생한다

누비의 진짜 매력은 바느질에서 드러난다. 누비선은 단순히 천을 꿰매는 것이 아니라, 옷의 전체적인 무늬와 구조를 결정한다. 최 장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바느질은 눈으로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일정한 간격, 흔들림 없는 선, 그리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선은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녀는 하루 종일 앉아 바늘을 움직여도 길이 20cm 정도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누비는 옷을 덮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덮는 것입니다. 바늘 한 땀마다 제 마음이 들어가야 해요.”
그 바늘질은 때로는 단순한 직선, 때로는 격자무늬, 때로는 꽃과 구름을 닮은 장식무늬가 된다. 그 패턴 속에는 단순한 장식이 아닌 기원과 염원이 담긴다. 옛 어머니들이 아이의 저고리에 꿰맨 누비선에는 자식을 향한 건강과 무탈함의 기도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누비가 지켜온 삶의 역사가 담겨있는 장인의 하루

누비옷은 단순히 따뜻한 옷이 아니다. 조선 시대 병사들은 갑옷 안에 누비옷을 입어 체온을 유지했고, 농민들은 겨울 농사일을 버틸 수 있었다. 상류층 여성의 예복에도 누비는 사용되었는데, 정교한 문양과 실의 색깔로 신분과 권위를 나타냈다.
최 장인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잘 알고 있기에, 옷을 만들 때마다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시간을 잇는 유산’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그녀는 종종 지역 박물관의 복원 작업에도 참여해, 낡은 누비옷을 손수 바느질로 되살린다. “헌 옷에는 바느질한 이의 손길과 체취가 남아 있습니다. 저는 단지 그것을 다시 이어주는 사람일 뿐이지요.”

 

전통을 미래로 잇는 장인의 하루

오늘날 누비의 설 자리는 줄어들었지만, 최근 젊은 디자이너들이 전통 누비를 현대 패션과 접목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최 장인도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전통 기법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작품을 시도한다. 누비로 만든 소품, 가방, 심지어 스마트폰 케이스까지, 젊은 세대가 생활 속에서 전통을 접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있다.
그녀는 공방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어린 학생들이 바늘을 잡고 몇 땀 꿰매는 경험만으로도, 누비의 고요하고 따뜻한 매력에 매료된다고 한다. “저는 제 손으로 만든 옷이 백 년 뒤에도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의 사람들이 이 옷을 보며 ‘옛사람들이 이렇게 정성을 다했구나’ 하고 느낀다면, 제 삶은 충분하지요.”

 

마무리

진주 누비 장인의 하루는 단순한 바느질의 연속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인의 삶과 정신을 꿰매는 작업이다. 천과 솜, 바늘과 손끝 사이에서 태어나는 누비옷은 단순히 몸을 덮는 옷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따뜻한 유산이다. 오늘도 최 장인은 바늘을 들고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는 손길로 천년의 온기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