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의 오래된 골목 한편,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사진 공방이 있다. 간판에는 ‘사진 복원·필름 스캔 전문’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적혀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특유의 필름 냄새가 스민다. 이곳의 주인장 정민호(가명, 58세) 장인은 35년 동안 빛바랜 사진과 상처 난 필름을 되살리는 일을 해왔다. 그의 손길을 거치면 색을 잃어버린 흑백사진이 다시 생기를 되찾고, 긁힘과 곰팡이로 가득 찬 필름이 과거의 숨결을 품은 채 화면 속에 살아난다.
그는 말한다. “사진은 과거를 담은 창이에요. 그 창이 흐릿해지면, 그 안의 기억도 사라지죠. 제 일은 그 창을 닦아주는 겁니다.”
먼지와 곰팡이를 지우는 섬세한 손길이 숨어 있는 장인의 하루
정 장인의 하루는 아주 작은 붓과 부드러운 극세사 천을 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객이 가져온 필름을 조심스럽게 꺼내 먼지를 털고, 표면에 핀 곰팡이를 특수 용액으로 닦아낸다. 오래된 필름은 조금만 힘을 줘도 찢어지기 때문에 손끝의 압력을 정밀하게 조절해야 한다.
그는 한 번, 1972년 서울에서 촬영된 결혼식 필름을 맡았다. 필름 절반 이상이 곰팡이에 덮여 있었고, 색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3일간 그 필름의 곰팡이를 조금씩 제거하고, 고해상도 스캔 후 디지털 복원을 진행했다. 완성된 사진 속 신랑·신부는 마치 어제 찍은 듯 선명했고, 이를 본 고객은 눈시울을 붉혔다.
장인의 하루에는 색을 다시 불어넣는 기술이 있다
흑백사진을 컬러로 되살리는 작업은 단순히 색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색을 ‘재현하는’ 일이다. 정 장인은 복원 의뢰가 들어오면 당시 유행했던 의상 색상, 조명, 카메라 특성을 연구한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여름 해변 사진이라면, 하늘은 조금 더 옅은 파란색, 바다는 약간 초록빛이 도는 색감을 구현한다.
그는 한 고객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입었던 군복 사진을 복원할 때, 군복의 원래 색상을 찾아내기 위해 국방부 군복 자료까지 찾아봤다. 이렇게 복원된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 시대를 함께 숨 쉬는 한 장면이 된다.
추억을 되돌려주는 시간을 담는 장인의 하루
정 장인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사진 속 인물과 의뢰인의 표정이 닮아 있을 때다. 어느 날, 한 30대 여성 고객이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 복원을 요청했다. 사진 속 소녀는 웃고 있었는데, 복원이 끝난 이미지를 본 고객은 “어머니가 웃을 때 제 표정이랑 똑같아요”라며 웃었다. 그는 그때 느꼈다. 사진 복원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라는 것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을 복원하면 단순히 이미지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과 관계까지 복구하는 겁니다.”
장인의 하루는 오늘도 빛을 되찾는다
정민호 장인의 작업실은 오늘도 모니터 빛 아래 고요하다. 그는 하나의 사진을 완성하기 위해 수십 번의 확대·축소를 반복하며, 보이지 않는 먼지를 지우고 색의 균형을 맞춘다. 완성된 사진을 프린트해 건네는 순간, 고객의 눈가에 번지는 미소와 눈물이 그의 하루를 빛나게 한다.
그는 하루에 많아야 두세 건의 작업만 받는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그는 속도를 늦추는 대신 정밀함과 온기를 선택했다. “사진 속 그때의 공기, 그때의 웃음을 다시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게 제 하루를 완성시키는 겁니다.”
서울 종로, 빛바랜 사진과 낡은 필름을 되살리는 정민호 장인의 하루. 섬세한 손길과 시대 재현 기술로 추억을 복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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