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의 하루는 찢어진 책 속에도 시간이 흐른다
책은 사람의 기억과 지식을 담는 매개체다. 하지만 오래된 책은 찢어지고, 페이지가 떨어지고, 표지가 낡아간다. 대부분 사람들은 새 책을 사지만, 누군가는 그 책을 다시 엮어 생명을 불어넣는다. 서울 중구 필동 골목의 작은 작업실, 그곳에서 황영길(가명, 69세) 씨는 오늘도 조용히 실을 들고 책을 엮고 있다. 그는 45년 넘게 고서와 낡은 책을 제본·복원해 온 장인이다.
황 장인은 말한다. “책은 한 사람의 역사예요. 다시 엮어주면, 그 사람의 시간도 다시 흘러가요.” 그의 하루는 그렇게 오래된 책들을 손으로 다시 묶고, 찢어진 페이지를 살리고, 다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일로 채워진다.
책 한 권에도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 장인의 하루
제본 작업은 단순히 접착제로 붙이는 것이 아니다. 황 장인은 먼저 책의 상태를 꼼꼼히 살핀다. 표지, 내지, 실밥, 종이 상태까지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본다. “손으로 느껴야 어디가 아픈지 알죠.”
특히 기억에 남는 작업은 1960년대 일기장 복원이다. 의뢰인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기장을 다시 보고 싶다며 가져왔다. 책은 완전히 풀리고, 글씨도 희미했다. 황 장인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접착제를 쓰지 않고 전통 실 제본 방식으로 다시 묶었다. 종이도 원래 질감과 비슷한 것을 찾아 덧붙였다. 완성된 일기장을 보고 의뢰인은 “이제 어머니와 다시 대화하는 기분이에요”라고 말했다.
장인의 하루는 제본의 글씨보다 손의 기억을 남긴다
황영길 장인은 제본을 단순히 책을 엮는 일로 보지 않는다. “책은 글씨를 읽는 거지만, 손으로 만지면서 읽는 것도 중요해요.” 그래서 그는 책 등(背)을 만들 때도 항상 손의 감각을 고려한다.
그는 사찰 불경, 족보, 오래된 학술서적까지 다양한 고서 복원을 맡아왔다. 한 번은 100년 된 족보를 복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고, 페이지마다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황 장인은 원래 페이지를 보존하면서 실로 다시 엮고, 표지 가죽을 새로 입혔다. 족보를 되찾은 가족은 “조상님들 얼굴을 다시 보는 것 같다”며 깊이 감사해했다.
낡은 책이 다시 사람 곁에 머무는 순간들이 모여 장인의 하루를 만든다
요즘은 전자책과 PDF 파일이 대세지만, 황영길 장인은 여전히 손으로 책을 엮는다. 그는 말한다. “전자책은 없어지면 끝이지만, 손으로 엮은 책은 남아요. 사람처럼.”
그의 작업실 한쪽 벽에는 다양한 책들이 줄지어 있다. 시집, 수필집, 전공 서적, 심지어 아이들의 그림책까지. 모두 낡고 찢어진 책이지만, 그의 손길을 거쳐 다시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그는 낡은 책을 펼쳐 페이지를 살피고, 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다시 묶는다. 그리고 완성된 책을 조용히 덮으며 생각한다. “이 책도 다시 누군가 손에 들고 읽겠지.” 황영길 장인의 하루는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과 시간을 다시 이어주는 일로 흘러간다.
서울 필동 골목, 오래된 책을 다시 엮는 제본 장인이 있다. 찢어진 페이지 속 기억까지 복원하는 그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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