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인간의 지혜가 가장 잘 응축된 발명품 중 하나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종이는 기계로 대량 생산되며, 수명이 길어야 수십 년 남짓이다. 그에 비해 일본의 전통 종이, **와시(和紙)**는 천 년을 버틴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나라현의 쇼소인(正倉院)에 보관된 8세기 문서들이 아직도 선명한 글씨를 유지하고 있는 사실은 와시의 놀라운 내구성을 증명한다.
와시는 단순히 기록을 위한 매체가 아니라 일본 미학과 장인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문화유산이다. 손으로 한 장 한 장 뜬 종이는 숨을 쉬듯 자연스럽고, 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투명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값싼 산업용 종이에 밀려, 와시를 만드는 장인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오늘은 일본 시마네현 깊은 산골 마을에서 와시 제작을 이어가고 있는 하라 유이치(가명) 장인의 하루를 따라가 본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종이는 단순한 기록지가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영혼의 그릇이다.

장인의 하루는 겨울 강가에서 시작되는 종이의 여정이다
와시는 겨울에 만들어진다. 찬 공기가 섬유를 깨끗하게 보존해 주고, 물이 가장 맑을 때이기 때문이다. 하라 장인은 새벽부터 강가로 나간다. 와시의 주재료는 닥나무(楮, 고지)인데, 이를 삶아 껍질을 벗기고 섬유를 추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는 장작불에 커다란 솥을 걸고 닥나무 껍질을 삶는다. 하얗게 익은 껍질은 손끝으로 하나하나 벗겨지고, 그 속살 같은 섬유가 드러난다. 이 섬유가 와시의 뼈대가 된다. 장인은 이를 물에 담가 불순물을 씻어내고, 대나무망 위에 부어 한 장의 종이를 뜬다.
이때 장인의 손놀림이 중요하다. 물을 흔드는 방식, 섬유가 얽히는 방향에 따라 종이의 질감과 강도가 달라진다. 하라 장인은 “종이는 물이 만든 그림”이라고 말한다. 종이를 뜨는 순간은 마치 대나무와 물, 섬유가 하나가 되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빛과 바람으로 완성되는 종이들이 장인의 하루이다
와시는 햇살과 바람으로 말린다. 기계 건조가 아닌 자연 건조 방식이 종이의 숨결을 살려주기 때문이다. 눈 덮인 마당에 종이판이 가득 놓이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면 종이는 점점 단단하고 투명해진다.
하라 장인은 종이를 들어 빛에 비춰본다. 균일한 두께와 섬세한 섬유의 결이 어우러져 마치 얇은 천처럼 보인다. 그 종이는 강하면서도 유연하다. 실제로 와시는 일본 전통 등불(초초)이나 병풍, 부채, 의식용 문서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그는 말한다. “와시는 단순한 종이가 아닙니다. 바람과 햇살, 물과 나무가 함께 만든 생명체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연과 공존하는 장인의 겸손이 담겨 있다.
장인의 하루 속에 천년을 버티는 종이의 비밀이 있다
와시가 천년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섬유의 구조에 있다. 닥나무 섬유는 길고 강인해 서로 단단히 얽히며, 화학 처리 없이 자연 그대로의 성질을 유지한다. 또한 종이에 풀 역할을 하는 ‘네리(ねり, 토로로아오이 뿌리에서 추출한 점액)’는 종이를 더욱 유연하고 탄탄하게 만든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와시는 시간이 지나도 잘 부서지지 않고, 곰팡이나 해충에도 강하다. 일본의 옛 문서와 그림, 불경들이 오늘날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와시 덕분이다. 실제로 세계의 박물관과 도서관에서도 귀중한 고문서를 복원할 때 와시를 사용한다.
하라 장인은 종이를 만들 때마다 “나는 시간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종이는 단순히 오늘 쓰고 버리는 소비품이 아니라, 백 년 뒤에도 천 년 뒤에도 누군가의 손에 남아 있을 작품이다.
사라져 가는 전통, 이어지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인의 하루
그러나 와시 장인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산업화 이후 값싼 종이가 쏟아져 나오면서 와시 수요는 급격히 줄었다. 한때 일본 전역에 수천 명에 달하던 와시 장인은 이제 몇 백 명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이 와시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면서 현대적 활용이 늘어나고 있다. 호텔 인테리어, 현대 미술 작품, 심지어 친환경 포장재까지 와시의 쓰임새는 다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들이 와시를 찾으면서 국제적인 수요가 늘고 있다. 하라 장인의 종이는 파리의 미술관 전시와 뉴욕의 갤러리에 전시되었고, “시간이 만든 예술”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말한다. “종이는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잇는 다리입니다. 와시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이제 세계인의 종이가 될 수 있습니다.”
마무리
하라 장인의 하루는 강과 불, 바람과 햇살 속에서 이어진다. 그는 단순히 종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엮고 미래를 준비한다. 와시는 천 년을 버틸 수 있지만, 장인의 정신이 없다면 단 하루도 이어지지 못한다.
“장인의 하루”가 기록하는 와시 장인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오늘의 흔적을 얼마나 오래 남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다시 살아나는 전통의 힘은, 결국 장인과 자연, 그리고 시간이 함께 만들어내는 기적임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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