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라디오는 추억 속 유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소리가 어린 시절의 유일한 친구였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한 다세대 건물 지하. 고전적인 튜닝 소리와 진공관의 불빛이 살아 있는 공간에서 이석진(가명, 64세) 장인은 고장 난 라디오를 수리한다. 그는 전자기기 수리 경력 40년, 빈티지 오디오와 라디오 복원만 전문으로 해온 전자 수리 장인이다.
그는 말한다. “요즘 기계는 소리를 내지만, 옛 라디오는 감정을 전해요. 그걸 살리는 게 내 일이죠.”
삐걱대는 소리 속에 숨은 사연이 담긴 장인의 하루
라디오 수리는 외형만 복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부 회로, 진공관, 스피커 콘 등 수십 년 묵은 부품들을 살펴야 한다. 이석진 장인은 납땜 냄새 가득한 작업대에서 고장 원인을 짚어낸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의뢰는 1968년 산 금성 라디오였다. 의뢰인은 아버지가 사용하던 라디오를 복원해 달라고 했고, 그는 진공관 하나하나를 수집해 가며 기능을 되살렸다. 튜닝 다이얼은 갈려 있었지만, 외부는 그대로 보존했다. 복원된 라디오는 다시 ‘삐-’ 하는 소리를 내며 정파음을 송출했다.
장인의 하루는 기계보다 감각이 우선되는 기술이다
이석진 장인은 복원할 기계를 먼저 손으로 들어본다. 진동, 무게감, 소리. 오래된 기계는 겉모습보다 내부 감각이 중요하다.
“요즘 기계는 칩 하나 바꾸면 끝나지만, 예전 라디오는 부품 하나하나가 다 살아 있어요.” 그는 구형 저항, 트랜지스터, 다이얼 벨트 등 국내 생산이 종료된 부품을 해외에서 직접 조달해 쓴다. 때로는 부품을 자작하기도 한다.
라디오 소리는 기억을 튜닝한다 장인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한다
소리를 되살리는 건 전자 기술만으로 되지 않는다. 적절한 진공관 교체, 주파수 필터 조정, 볼륨 톤 감쇠까지 섬세하게 튜닝해야 ‘그때 그 소리’가 난다.
어느 날 70대 노부부가 찾은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둘이 처음 맞춘 라디오가 고장 났다며 복원을 의뢰했다. 그는 소리만큼은 반드시 옛 감성 그대로 복원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손으로 주파수를 맞추는 특유의 뻐걱거리는 감각까지 살려냈다. 노부부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라디오를 켰고, 1970년대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켜지지 않던 기억에 다시 불이 들어오는 장인의 하루
이석진 장인의 공방에는 고장 난 빈티지 오디오와 라디오 수십 대가 쌓여 있다. 그 사이에서 그는 오늘도 옛 전자기기의 생명을 살린다.
“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순간, 사람들이 입을 막고 눈을 감아요. 그게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예요.” 그의 하루는 그렇게 고장 난 기계와 사람의 기억을 다시 튜닝하는 시간이다.
서울 종로구, 옛 라디오에 다시 소리를 불어넣는 장인이 있다. 전자보다 감정을 수리하는 그의 하루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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