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 먹(墨)이 천 년을 남긴다.” 한국 전통 서예의 세계에서 먹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예술의 근원이다. 검은빛을 띠는 작은 막대기 하나가 종이 위에 펼쳐지면, 그것은 글자를 넘어 인간의 정신과 철학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이 먹을 만드는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고되다. 숯가루와 아교, 향료를 섞어 굳히고 말리기를 수십 번 반복해야 한다.
오늘날 공장에서 찍어낸 화학 먹이 많지만, 진짜 전통 먹의 세계는 여전히 몇 안 되는 장인의 손끝에서만 살아 있다. 충청남도의 작은 작업실에서 만난 윤명수(가명) 장인은 40년간 먹을 빚어온 장인이다.

그의 하루는 새벽부터 숯을 고르고, 아교를 녹이며, 정성껏 반죽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의 손길은 단순한 도구 제작이 아니라, 검은빛에 정신을 새겨 넣는 예술이다.
장인의 하루는 숯가루와 아교, 먹으로 시작된다
윤 장인의 하루는 숯을 고르는 일에서 시작된다. 먹은 숯가루로 만들어지는데, 나무의 종류와 태우는 방법에 따라 색과 번짐이 달라진다. 그는 주로 소나무 숯을 고집한다. “소나무 숯은 기름기가 많아 먹빛이 깊고, 번짐이 부드럽습니다.”
숯을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든 뒤, 소의 가죽과 뼈에서 얻은 아교와 섞는다. 아교는 먹의 접착제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먹빛을 더 깊게 만든다. 여기에 약간의 향료를 섞어 특유의 은은한 향을 입힌다. 이 반죽을 나무틀에 넣어 찍어내면 비로소 먹의 형태가 잡힌다.
굳히고 말리는 고된 시간의 연속인 장인의 하루
찍어낸 먹은 바로 사용할 수 없다. 그늘에서 서서히 말려야 한다. 윤 장인은 먹을 나무 선반 위에 하나하나 올려둔다. 습도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마르는 속도가 다르다. 건조가 너무 빠르면 갈라지고, 너무 느리면 곰팡이가 핀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 먹을 살펴보며 뒤집고 위치를 바꾼다.
이 과정이 수개월 이어진다. 어떤 먹은 1년 가까이 건조해야 한다. 윤 장인은 “먹은 시간이 만드는 겁니다. 사람의 성격도 기다림 속에서 빚어지듯, 먹도 마찬가지입니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먹과 서예가 있는 장인의 하루, 그리고 세계의 잉크들
한국 전통 먹은 단순히 글씨를 쓰는 도구가 아니라, 마음을 담는 매개체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붓과 먹을 통해 자신의 수양을 확인했고, 글씨 한 획에도 정신을 담았다.
세계적으로도 잉크와 서예 문화는 다양하게 발전했다. 일본의 먹 제작은 한국과 비슷하지만, 향료와 장식에서 조금 더 화려하다. 중국은 대규모 생산으로 세계에 먹을 퍼뜨렸다. 서양에서는 잉크가 발전해 만년필과 인쇄술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통 먹의 깊은 먹빛은 여전히 세계 서예가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준다.
현대적 의미와 계승의 과제에 고민하는 장인의 하루
문제는 먹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시대에 글씨를 종이에 쓰는 일조차 드물어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세계에서는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커지고 있다. 일본과 유럽의 서예 동호회에서는 한국 먹을 찾는 경우가 늘고 있다. 윤 장인은 해외 전시에서 직접 먹을 갈아 보여주며 관람객들에게 감동을 준 적이 많다.
그는 젊은 제자들과 함께 ‘현대 먹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단순한 서예 도구를 넘어, 먹으로 만든 현대 미술 작품이나, 인테리어 소품으로의 확장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이다.
마무리
윤명수 장인의 하루는 숯과 아교, 그리고 기다림 속에서 완성된다. 그가 빚어낸 먹은 단순한 검은 막대가 아니라, 인간의 사유와 정신을 담는 도구다.
전통 먹을 이어가는 일은 단순한 공예 계승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의 손끝과 정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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