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예천의 한 시골 마을, 언덕 아래 자리한 오래된 대장간에서는 여전히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쇠를 달구는 풀무질 소리, 망치가 쇠를 두드리는 청아한 리듬이 이 마을의 아침을 깨운다. 이곳의 주인인 최영만(가명, 68세) 장인은 45년 넘게 대장간 불을 지켜온 장인이다.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단순히 농기구나 도구가 아니다. 그는 쇠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 속에 예술적인 감각을 담는다. “쇠는 뜨겁게 달궜을 때만 말을 합니다. 차갑게 식으면 다시는 변하지 않죠. 사람 마음도 그와 비슷합니다.” 최 장인의 이 말은, 그의 인생과 작업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장인의 하루는 불과 함께 시작되는 하루이다
최 장인의 하루는 새벽 해가 떠오르기도 전, 대장간의 불을 지피는 것에서 시작된다. 풀무를 당기며 불길을 키워내는 작업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의식과도 같다. 온도가 충분히 오르기 전까지 쇠를 넣지 않는다. 불이 살아 있어야 쇠도 살아난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다.
한 번은 어느 농부가 부러진 낫을 들고 찾아왔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새것을 사라고 권하겠지만, 최 장인은 달랐다. 그는 부러진 낫을 불 속에 넣어 달구고, 망치질로 형태를 다시 잡아주었다. 농부는 수십 년 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낫이라 버릴 수 없다고 했다. 낫이 다시 제 기능을 되찾자, 농부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런 순간이 최 장인에게는 가장 큰 보람이다.
단순한 힘이 아닌 망치질에 담긴 리듬이 있는 장인의 하루
쇠를 두드리는 망치질은 단순한 힘이 아니다. 최 장인은 항상 일정한 박자로 망치를 내리친다. 쇠의 온도, 두께, 원하는 형태에 따라 리듬과 힘이 달라진다. 그는 말한다. “망치질은 음악과 같습니다. 잘못된 음이 섞이면 전체가 어긋납니다.”
그는 도끼를 만들 때는 강한 힘과 리듬감 있는 망치질을 하고, 작은 칼을 만들 때는 부드럽게 여러 번 두드려 형태를 잡는다. 손님들이 그의 작업을 지켜보며 “쇳소리와 망치 소리가 마치 전통 음악 같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에게 대장간은 곧 작은 공연장이자 무대였다.
장인의 하루는 쇠에 담기는 삶의 이야기가 묻어 있다
대장간은 단순히 쇠를 다루는 곳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이는 장소였다. 누군가는 고장이 난 쟁기를 들고 와서 고쳤고, 또 누군가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칼을 다듬어 달라며 맡겼다. 최 장인은 단순히 도구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추억과 시간을 함께 복원했다.
특히 그에게는 잊지 못할 의뢰가 있다. 한 청년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쓰던 호미를 들고 와, 기념으로 고쳐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는 녹이 슨 호미를 불 속에 달군 뒤, 조심스럽게 망치질하며 본래의 형태를 되살렸다. 청년은 완성된 호미를 들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이제 아버지가 곁에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 최 장인은 ‘쇠도 사람처럼 기억을 품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불멸의 불꽃과 장인의 철학이 담긴 장인의 하루
대장간 불은 쉬지 않고 타오르듯, 최 장인의 삶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체력은 예전 같지 않지만, 여전히 매일 아침 불을 지피고 쇠를 두드린다. 그는 말한다. “쇠를 다루는 건 제 삶의 일부입니다. 제가 멈추는 순간, 이 불도 꺼질 겁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기술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전통을 전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역 청년들에게 대장간 체험을 열어 직접 망치질을 가르치며, 쇠와 불, 그리고 땀 속에서 만들어지는 삶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 그의 하루는 여전히 불꽃처럼 뜨겁고, 쇠처럼 단단하게 흐르고 있었다.
경북 예천, 45년간 대장간 불을 지켜온 최영만 장인의 하루. 불과 망치질로 쇠에 생명을 불어넣는 전통 장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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