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남자의 멋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추억의 일부였던 라이터. 지금은 일회용 전자라이터에 밀려 구식이 되었지만,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낡은 라이터를 손에 쥐며 시간을 떠올린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골목 안, 조용한 금속 소품 공방에서 정우철(가명, 66세) 장인은 고장 난 오래된 라이터를 복원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는 40년 이상 라이터 복원과 소품 수리를 전문으로 해온 장인으로, 지포(Zippo)·듀퐁(Dupont)·IM코로나 등 빈티지 수동 라이터의 기능과 감성을 되살리는 일을 한다.
정 장인은 말한다. “불이 다시 붙으면, 기억도 다시 살아나요. 나는 단순히 라이터를 고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멈춰둔 시간을 이어주는 겁니다.”
오래된 라이터에는 사연이 남는다고 믿는 장인의 하루
정 장인의 공방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라이터를 단순한 물건이 아닌 ‘기억의 조각’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 고객들은 낡은 라이터를 손에 들고 사연부터 이야기한다. 어떤 이는 군대 시절 친구와 나눠 가진 라이터를, 또 어떤 이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평생 지녔던 라이터를 조심스럽게 내민다.
기억에 남는 의뢰는 한 고객이 맡긴 1972년 산 지포 라이터였다. 라이터는 형의 군복무 시절부터 함께한 유품으로, 녹슬고 심지는 타버린 상태였다. 정 장인은 외형을 살리되 기능만 복원하기로 하고, 낡은 휠을 세심히 갈고 심지를 교체했다. 광택은 일부러 내지 않았다. 흠집 하나하나가 고객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고객은 복원된 라이터를 켜보며 “형이 다시 내 옆에 있는 것 같아요”라며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기계가 아닌 손으로 기억을 복원하는 장인의 하루
수많은 부품이 정교하게 맞물려 작동하는 기계식 라이터는 손맛이 없으면 다룰 수 없다. 정 장인은 부품의 구조와 마모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느낌을 판단한다. 자동화된 수리장비 없이, 오직 핀셋과 줄, 황동광택제, 전통 세공도구를 사용한다.
정 장인은 “라이터는 작지만 정밀해요. 돌 하나, 심지 한 줄, 뚜껑의 텐션까지 정확해야만 예전 그 소리가 나요.”라고 말한다. 그는 프랑스 듀퐁 라이터의 ‘짤깍’ 소리를 완벽히 재현하기 위해 부품을 직접 가공하기도 한다. 어느 날엔 부품이 단종된 라이터를 위해 황동을 깎아 휠을 재제작했고, 결과적으로 라이터는 예전의 불꽃과 소리를 되찾았다.
기계는 빠르게 고칠 수 있지만, 정 장인은 말한다. “라이터는 불만 붙인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손에 쥐는 감각, 여는 소리, 기억까지 살아 있어야 복원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장인은 흔적을 지우지 않고 시간을 보존한다 그것이 장인의 하루이다
복원이라고 해서 모두를 새것처럼 만들지는 않는다. 정우철 장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기억의 흔적을 보존하는 것’이다. 심한 부식이나 파손이 아닌 이상, 외형에 손대지 않는다. 빛바랜 도장, 눌린 금속, 벗겨진 색감까지도 모두 고객의 시간이다.
그는 말한다. “모두 반짝이게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라이터는 그 사람이 기억하는 물건이 아니죠.” 이 원칙은 모든 수리에 적용된다. 오히려 정 장인은 복원보다 ‘되살림’이란 표현을 쓴다. 기능만 살리고, 나머지는 시간 그대로 두는 것.
예전에 고객이 건넨 라이터에는 연인의 이니셜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 글자를 살리기 위해 폴리싱을 일부러 피하고, 그 부위는 천으로만 닦았다. 라이터는 다시 불을 켰고, 고객은 “이건 그냥 물건이 아니에요. 제 시간을 복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짧은 불꽃 안에 살아 있는 장인의 하루
공방 한켠엔 복원된 라이터들이 줄지어 있다. 종류도 시대도 모두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다시 불이 붙고, 누군가의 손에서 다시 켜질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이다.
정 장인은 하루에 두 개 이상 수리하지 않는다. 시간과 집중, 감각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는 낡은 라이터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고 휠을 만진다. 그리고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켜지는 순간, 비로소 그 하루가 의미를 가진다.
“작은 불 하나 붙였다고 할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겐 그 불이 다시 켜지기를 기다렸을지도 몰라요.” 그의 하루는 그렇게 멈춰 있던 누군가의 불꽃을 다시 밝히는 일로 흘러간다.
서울 마포, 오래된 라이터를 다시 불붙이는 장인이 있다. 손끝에서 추억이 깨어나는 정우철 장인의 하루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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