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의 하루

장인의 하루 동네 숨은 고수 인터뷰 중 사라져가는 유기 공예, 놋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장인

goomio1 2025. 8. 22. 07:12

서울 종로의 한 좁은 골목길 끝. 오래된 간판에 ‘○○유기방’이라 적힌 작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황금빛으로 빛나는 놋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곳의 주인공은 최영호(가명, 68세) 장인이다. 그는 40년 넘게 유기(鍮器) 제작에 몰두해 온 사람으로, 우리 전통 제기와 밥상 문화를 지켜온 숨은 고수다. 그의 하루는 쇳덩이를 불에 달구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아직 어둑한 새벽, 장인의 공방에는 벌겋게 달아오른 불꽃과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놋그릇에 생명을 담아 유기 공예를 이어가는 장인의 하루

“쇠는 불과 망치 앞에서만 본래의 성질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저는 하루도 이 과정을 빼먹을 수 없어요.” 최 장인은 담담히 말한다.

 

불꽃 속에서 깨어나는 쇳덩로 시작되는 장인의 하루

유기 제작의 시작은 쇳덩이를 불에 달구는 일이다. 최 장인은 구리와 주석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전통적인 합금을 만든다. 이때 비율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릇이 금세 깨지거나 색이 바래버린다. 그는 이 과정을 “쇠에 혼을 불어넣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불길 속에서 녹아내린 쇳물이 주형에 부어지고, 시간이 지나며 굳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옛날에는 이 작업을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했습니다. 제사나 잔치에 쓸 그릇을 맞추려면 대여섯 명이 모여서 하루 종일 불을 지펴야 했죠. 지금은 제가 혼자서 그 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사라져 가는 전통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장인의 하루는 망치와 손끝이 빚어내는 곡선이다

주형에서 꺼낸 놋쇠는 여전히 거칠고 투박하다. 여기서부터 장인의 진짜 실력이 드러난다. 최 장인은 망치로 두드리며 그릇의 형태를 다듬어 나간다. 망치질 소리가 공방에 메아리치듯 울린다. 수백 번, 수천 번 두드리는 과정을 거쳐야만 매끄러운 곡선이 완성된다.
그는 말한다. “쇠는 두드려야 살아납니다. 한 번에 힘을 주면 금이 가고, 너무 약하게 치면 모양이 잡히지 않아요. 손끝으로 쇠의 숨결을 읽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의 손등에는 굳은살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고, 손가락은 오랜 세월 쇠를 다뤄온 사람만의 단단함을 품고 있었다. 그 손끝에서 태어난 놋그릇은 단순한 식기가 아니라, 세월의 흔적과 장인의 철학을 담은 예술 작품이었다.

 

장인의 하루는 제기(祭器)에 담긴 마음이다

최 장인의 작업실 한쪽에는 제사에 쓰이는 제기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밥그릇, 탕기, 종지, 술잔까지 하나같이 빛을 머금은 듯 고요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제기는 단순히 음식을 담는 그릇이 아닙니다. 조상과 후손을 이어주는 다리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만드는 내내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은 젊은 부부가 공방을 찾아와 제기를 맞췄다. 그들은 부모님의 뜻을 이어가고 싶다며 작은 제기 세트를 주문했다. 최 장인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더욱 정성을 쏟아 만들었다. 부부는 완성된 제기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인의 손길 덕분에 우리의 전통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사라져 가는 전통을 이어가며 장인의 하루가 완성된다

오늘날 스테인리스와 플라스틱이 식탁을 채우면서 유기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최 장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온라인을 통해 젊은 세대와 연결하고, 놋그릇의 건강한 특성을 알리며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가고 있다. 유기는 항균 효과가 있고 음식의 맛을 오래 유지시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전통은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대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최 장인은 오늘도 불을 지피고 망치를 든다. 그가 만든 놋그릇은 단순히 음식 담는 도구가 아니라, 세대를 넘어 마음을 잇는 유산이 되고 있었다.


서울 종로, 40년째 전통 유기 공예를 지켜온 최영호 장인의 하루. 불과 망치로 빚어낸 놋그릇에 담긴 철학과 이야기를 만난다.